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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BALCONY Column] 쇼스타코비치 패러독스 조회수 70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4-06-06 11:00:00






 

 

[BALCONY Column] 자유를 빼앗기고 풍자와 청중을 얻다
- 쇼스타코비치 패러독스
Club BALCONY 매거진 112호 (2024년 4~6월호) 中

글/유윤종 동아일보 문화 전문기자. 28년째 중단과 복귀를 반복하며 일간지 음악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극 I형 인간이지만 음악 얘기를 나누는 일은 마다하지 않는다. '매혹되며 살기'가 가장 중요한 목표다.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작곡가 중 콘서트홀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는 소련 당국의 강요에 따라 서사적(敍事的)인 작곡가가 되었고 그가 당국의 억압을 교묘하게 피한 사실은 또 하나의 서사가 되었다. 고전 음악의 황금기에 청중과 후원자들이 가했던 대중주의의 압력을 그에게서는 소비에트의 체제가 대신했다. 그 체제의 공포가 없었다면 오늘날 청중을 매혹시키는 쇼스타코비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순을 ‘쇼스타코비치 패러독스’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4월 서울은 구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설계한 음향으로 뜨겁다. 3일 서울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에서 여섯 오케스트라가 그의 교향곡 15곡 중 8번, 10번, 11번, 13번 등 네 곡과 협주곡 여섯 곡 중 피아노 협주곡 2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첼로 협주곡 1번 등 세 곡을 연주한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 지휘로 4일, 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정기연주회 메인 프로그램에 그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올렸다.

 쇼스타코비치는 만 69년에서 닷새 모자라는 소비에트 연방(1922~1991)의 역사에서 국가와 체제를 대표한 세 작곡가-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랸-중에서도 가장 우뚝한 존재였다. 자신의 소망에 부합했는지와 상관없이 ‘인민의 베토벤’이 된 그는 훗날 사라진 소련의 꿈을 대표했다. 그 꿈은 영웅적이고 찬란한 꿈이기도 했고 악몽이기도 했다. 두 세계 대전 사이의 시기에서 미중(美中) 화해에 이르는 우주 개발과 핵무기의 시대에 이 ‘소련 대표 작곡가’는 거대한 교향악의 탑을 쌓아 올렸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그 영화적인, 즉 시각적인 요소이다. 열세 살에 신동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곳곳의 영화관에서 무성 영화를 피아노로 반주해 가계를 도왔다. 치고 달리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블랙 유머, 관객을 긴장시키는 서스펜스의 축적을 그는 타고난 감각으로 소화해 인기를 끌었다.

 이 아르바이트는 작곡가로서 쇼스타코비치가 개성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속도감이 깃든 탁월한 리듬감과 때로 잔인할 만큼의 즉물성은 이 젊은 작곡가가 가진 실험 정신과 맞물려 놀라운 효과를 낳았다. 러시아 혁명 초기에 숨 쉴 공간이 충분했던 소련에서,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에 심취했던 20대 초반의 젊은 작곡가는 상상이 허용하는 한의 실험과 독자성을 원했다. 그러나 그가 모색한 새로운 길은 점차 ‘사회주의 리얼리즘’ 및 ‘인민 대중의 요구’와 충돌하는 것으로 비쳤고, 그는 그때마다 목숨을 지킬 우회로로 아슬아슬하게 퇴각했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스탈린을 자극하다

  1936년 1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스탈린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이 작품에 드러난 음악적 어법을 이해할 수 없었던 데다, 여인이 시아버지를 독버섯으로 독살한다는 설정이 암살의 공포에 시달리던 스탈린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이어 관영 신문 프라우다에 < 맥베스 부인>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실렸다. 기사 제목은 ‘음악이 아니라 황당무계’였다. “이 오페라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어긋나며 지극히 부르주아적이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기고자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스탈린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와 표현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1933~38년은 스탈린의 대숙청이 절정에 달했고 수백만 명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던 시기였다. 쇼스타코비치의 가까운 인척 중 세 명도 유형을 갔고 소식이 끊겼다. < 맥베스 부인> 비판 기사가 실릴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4번 교향곡 초연을 앞둔 상태였다. 급진적 어법과 따끔한 풍자, 블랙 유머로 점철된 작품이었다. 어느 날 연습 도중 쇼스타코비치는 지휘대에 걸어 올라가 악보를 들고 사라져 버렸다.

  대신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교향곡에 착수했다. 불과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작품은 완성됐다. 새 교향곡은 1937년 11월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이 초연했다. 연주가 끝나자 갈채의 회오리가 일었다. 교향곡 자체 길이와 비슷한 40여 분의 갈채였다. 비평가들은 이 곡에서 쇼스타코비치가 ‘개인주의적 혼돈과 형식주의 실험으로부터 자기를 구했다’고 썼다. 소련은 이 작품에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부여했고 새 교향곡은 3년 내 소련 전역에서 연주됐다.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사회적 생명과 생물학적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뒤에 소개할 솔로몬 볼코프에 따르면 작곡가는 이 곡의 영웅적인 피날레에 대해 “사람들이 몽둥이로 맞으며 부들부들 떨면서 ‘우리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며 행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소비에트의 청중은 이 곡에 숨은 함의를 알지 못했을까. 비평가들과 당 관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까. 당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피신해 있던 지휘자 쿠르트 잔데를링크는 “청중들 모두 작품의 진실을 눈치챈 채 갈채를 보낸 것”이라고 훗날 말했다. 레닌그라드 초연 이후 모스크바 초연 때에는 청중들이 환호를 보내면서도 ‘이 때문에 내가 잡혀가지 않을까’라는 공포에 떨었다는 증언도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체제에 순응했을까

  그의 줄타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이 승전한 1945년, 소련 당국은 영웅적이고 축제 같은 교향곡을 기대했지만 그는 우스꽝스러운 행진곡으로 시작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했다. 교향곡 13번 ‘바비야르’(1961)는 외면상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규탄하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는 소련 체제 내부에도 유대인 차별이 상존함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체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시선은 공식적이든 아니든 소련 내부에서도 있었다. 이에 대한 논의에 공식적으로 불을 붙인 것은 그의 사후 출간된 솔로몬 볼코프의 책 『증언』(1979)이었다. 볼코프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학부 졸업 후 음악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는 레닌그라드의 젊은 작곡가들에 대한 책을 쓰면서 쇼스타코비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작곡가가 구술하고 음악 학자가 정리하는 형식이었다. 이를 계기로 볼코프는 노경에 접어드는 작곡가의 회상을 정리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가 모스크바의 음악지 <소비에트 음악> 편집자가 되면서 두 사람은 늘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아파트와 이 잡지의 사무실은 같은 건물이었다.

 훗날 볼코프의 책에 담긴 말들을 실제로 쇼스타코비치가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노작곡가는 ‘내가 죽은 후에’ ‘서방에서’ 구술 내용을 발표하도록 부탁했다고 볼코프는 말했다. 이 때문에 ‘증언’ 속 내용에 대한 신뢰성은 미국 인디애나대의 맬컴 브라운을 비롯한 학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아들인 지휘자 막심은 1981년 서방으로 망명한 이후 볼코프의 책에 담긴 내용은 진실이 맞다고 증언했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옛 지인들도 소련 붕괴 후 대체로 ‘증언’의 진실성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겉모습에서부터 신경과민이 드러나는 이 ‘소비에트 대표 작곡가’의 진실에 대해 볼코프는 그 핵심을 러시아 민족의 고유한 관념인 ‘유로지비юродивый’에서 찾는다. 유로지비란 바보인 척하는, 바보처럼 처신하는 예지자(叡智者)이며, 풍자를 사용해 관습과 억압을 조롱하는 광대와 같은 존재다. 유로지비는 의식적으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권력자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피한다. 볼코프에 의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을 러시아 음악 역사상 두 번째 유로지비로 간주했다. 첫 번째 유로지비는 ‘벼룩의 노래’가 증명하다시피 모데스트 무소륵스키(1839~1881)였다.



 

 

오늘날,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들에서는 즉물성과 서사성의 결합이 두드러진다. 거칠게 관념화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면 즉물성이란 감정보다 감각, 주관성보다 객관성을 앞세우는 경향이다. 서사성이란 감정, 영웅적인 것, 집단적인 고조를 투영하는 것이다. 즉물성과 서사성은 결합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를 획득한 교향곡들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즉물성과 서사성의 (외견상) 성공적인 결합을 성취했다.

 교향곡 5번을 발표한 뒤 쇼스타코비치는 공적 매체에 “셰익스피어가 비극을 긍정한 것처럼 적극적인 이념으로 가득 찬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의 교향악에 자주 나타나는 비극성과 서사성은 그에게 천부적인 것이거나 내면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을까. 이는 그가 소련에 ‘겉으로만’ 충성했는지와는 별개로 정답을 구하기 어려운 요소다. 그것은 권력의 억압과 내면의 투쟁을 투영한 진정한 비극성이었을 수도 있고, 당의 요구를 좇아 서사성과 비극성을 강조하는 것만이 자신의 목숨과 사회적 지위를 구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결과일 수도 있다. 또는 그가 실제의 내면과 상관없이 내면으로 투쟁했다는 증거를 남기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음악사의 황금기는 대부분 작가주의와 대중주의의 긴장 속에서 탄생했다. 작곡가들은 자신의 고유한 수법을 수립해 자신과 같은 전문가, ‘프로’ 그룹 사이에서 금자탑을 세우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를 견제할 반대 항력의 힘은 ‘이해하기 쉬운 작품으로 유명해지고 수입을 올려야’ 한다는 압력이었다. 오늘날 ‘진지한’ 음악의 작곡가들은 대부분 교육 기관과 국가, 지방 자치 단체에 경제적 토대를 의존하며 그들에 대한 평가는 프로 그룹 속에서 나온다. 소련의 경우 대중의 경제적 압력은 사라진 뒤였지만 그 대중주의는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써라’라는 관료주의와 이념으로 대체됐다. 국가가 행사한 대중주의와 작가 자신의 작가주의가 행사한 아슬아슬한 긴장 사이에서 탄생한, 그리하여 함께하기 어려울 수 있는 즉물성과 서사성이 함께 어깨동무한 교향곡들이 쇼스타코비치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이지만 우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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