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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예슬의 듣는 생활] 탁월한 퍼포머들 조회수 382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4-04-17 18:00:00






 

 

[신예슬의 듣는 생활] 탁월한 퍼포머들
— 타악 연주자 마리안나 베드나르스카, 진유영
BALCONY's Column | 클럽발코니 온라인 칼럼

글/신예슬 음악 칼럼니스트


 



  오케스트라가 올라오곤 하는 그 넓은 통영국제음악당의 콘서트홀 무대 위엔 타악기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마리안나 베드나르스카는 무대의 정중앙으로 걸어들어왔고, 무대 조명이 꺼지고 곧 중앙으로부터 살짝 떨어진 곳에 놓인 봉고와 툼바, 톰톰, 큰북, 우드블록 세트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무대의 한 부분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첫 곡은 크세나키스의 <리바운드 B>(1989)였다. 가죽 악기, 나무 악기의 쾌청하고도 정확한 소리가 콘서트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리듬과 음색만으로 곡 전체를 끌고 가는 이 곡은 다른 리사이틀에서라면 야심 차게 피날레 곡으로 놓을 만한 강렬한 곡이자, 현대 타악 레퍼토리의 새로운 고전 중 하나라고 할만한 작품이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Sung Chan Kim


  자신의 기준점을 설정하는 것 같았던 첫 곡 이후, 통영국제음악제에서의 리사이틀은 서로 다른 질서로 이루어진 곡들을 하나둘 펼쳐놓는 식으로 이어졌다. 이어진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의 프렐류드와 사라방드였다. 한껏 느긋한 이 곡을 연주하며 잠시 선율과 다성에 대한 감각을 깨우고는 곧장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을 연주하며 마림바에서의 비르투오시티를 선보였다. 어느 하나 염두에 두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는 것을 하나하나 증명하는 듯한 흐름이었다.

  “마리안나 베드나르스카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폴란드 출신 타악기 연주자다. 독주자, 실내악 연주자, 오케스트라 연주자, 교육자 등으로 세계 음악계에 명성을 얻고 있다.”라고 그는 소개된다. 그의 홈페이지에서도 “classical percussionist”라는 태그라인을 볼 수 있다. 둘 모두 그를 아주 훌륭한 연주자로 이해하게 하는 수식어들이지만, 그의 이름을 더욱 힘주어 기억하게 만드는 순간은 그가 아주 고전적인 의미의 연주를 할 때만은 아니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Sung Chan Kim


  아페르기스의 <몸에서 몸으로>을 연주하며 마리안나는 무대 정중앙으로 나와 마이크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페르시아의 악기 자브를 연주하기 전, 먼저 목소리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거의 연기에 가까운 표현들을 내뱉었고, 목소리와 악기는 거의 하나처럼 움직이다가도 한 장면을 이루는 두 등장인물처럼 갈라지며 전혀 다른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카 레이싱 장면의 한순간을 포착하는 듯했던 이 작품에서 연주자는 때론 운전자가 되어야 했고, 어느 순간은 해설자가 되어 빠르고 생생하게 말해야 했고, 가끔은 끽, 하고 멈춰 서는 자동차 그 자체가 되어야 했다.

  글로보카르의 <?신체적인>은 연주자가 손 앞의 악기뿐 아니라 자신의 신체를 타악기처럼 두드리는 곡이다. 신체가 주요 악기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만큼 여기엔 목소리도 거들었다. 몸의 안팎, 그리고 표면을 모두 소리 내는 도구로 사용해야 했던 이 작품에서 연주자는 쉽지 않은 과제를 해내야 한다. 바로 몸을 드러낸 채 몸의 곳곳을 ‘친다는 사실’에 쉽게 멈추게 되는 관객의 관심을 신체가 낼 수 있는 그 다채로운 소리로 옮겨와 정말로 이 작품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이었다. 아페르기스와 글로보카르의 작품에서 요구되는 역량은 고전적 연주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전자음악과 함께하는 연주, 널리 사랑받아온 피아졸라의 작품 등 조금 다른 음향과 리듬에 기반한 작품들의 연주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리사이틀을 가장 흥미롭게 만든 순간들은 바로 그의 퍼포먼스가 빛나던 때였다. 신체를 악기로 사용할 때의 태도. 그리고 연주와 연기가 구분되지 않는 순간, 그리고 손과 신체, 사물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바라보게 만드는 정교한 움직임들. 이런 복합적인 감각이 가득한 공연을 보며, 그저 훌륭한 ‘연주자’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이런 음악가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까?



<진유영 - 타성아세 보리살타와 제,도,의식급정근> ⓒ이소정


  마리안나의 공연으로부터 약 세 달 전, 서울 용산구의 ‘윈드밀’에서는 타악 연주자 진유영의 공연 ‘활주로 위 이방인’이 열렸다. 이날 프로그램은 작곡가 윤지영의 <EXIT>와 아페르기스의 <그래피티>, 이유정의 <발림, 말 없는 노래>, 니콜라우스 A. 후버의 <핑거 카프리치오>, 슈토크하우젠의 <콧날개춤>이었다. 고전의 자리에 놓아도 어색함이 없는 작품부터 이제 막 완성된 신작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 진유영은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드넓은 무대를 구성해 곡마다 서로 다른 물체와 악기들을 연주했다. 마림바와 북, 드럼 세트 등 기존 타악기와 돌, 비닐, 금속 프레임, 호스 등 일상의 사물까지 그는 총 30여 개의 악기를 연주하는 동시에 말과 언어, 목소리, 몸짓을 통해 신체 전체를 퍼포밍했다.

  진유영의 공연은 전자음악과 마림바 연주로 시작됐지만 아페르기스의 <그래피티>에서는 선을 하나하나 이어 그래피티를 만들어가듯 어떤 문장의 마지막 음절부터 시작해 최초의 온전한 문장에 이르는 과정을 ‘발화’했고, 이유정의 <발림, 말 없는 노래>에서는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다가도 달리듯 움직이고, 바닥에 눕는 등 소리를 만드는 원초적인 ‘몸짓들’을 드러냈다. 니콜라우스 A. 후버의 곡에서는 동료 연주자와 정교한 합주를 이어가며 연주자의 손끝 피부감각이 느껴질 정도로 날 선 감각을 선보였다. 그리고 슈토크하우젠의 <콧날개춤>에서 그는 드럼과 탐탐, 공을 연주하는 동시에 노래하고, 팔을 하늘로 쭉 뻗는 등, 다양한 제스쳐를 취하며 연주했다.



<이유정 - 발림, 말 없는 노래> ⓒ홍지영


  서로 다른 무대에서 이루어진 공연이지만 마리안나 베드나르스카와 진유영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들이 타악 연주자로서 예리하게 다듬어온 감각을 바탕으로, 보편의 연주를 넘어서는 탁월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진유영은 타악기 연주자이자 퍼포머, 창작자로, 오랜 시간 서양음악을 다루어왔고 현재는 근현대 레퍼토리와 퍼포먼스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때로 그는 신체 전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소리만큼이나 몸짓이 두드러지는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그를 훌륭한 ‘연주자’라고만 칭하기에는 그의 존재가 조금 벅차다.

  진유영은 기존 타악기부터 일상의 사물까지 폭넓은 악기를 다루며 자신의 음향 라이브러리를 풍성히 하는 동시에, 서로 다른 형태의 무대를 꾸려왔다. 윈드밀에서의 ‘활주로 위 이방인’뿐 아니라 지난 공연 ‘흙’에서는 온갖 악기의 재료와 그 재료들을 키워내는 흙이라는 물성을 탐구하며, 흙이나 모래로 만들어진 물체를 다룰 뿐 아니라 흙에 관한 퍼포먼스도 펼쳤다. <타성아세 보리살타와 제,도,의식급정근>는 흙이 놓인 땅을 향해 축문을 읽고 연주자가 소리로 세상을 맑게 하는 일종의 제사장이 되는 퍼포먼스로, 이는 ‘흙’ 공연의 상징적인 시작점과도 같았다. 그의 작업에서 공연은 리사이틀이나 연주회라기보단,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이런 그의 작업을 진유영은 ‘무지크테아터’라 부른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는 서사와 음악이 적절한 긴장을 이루는 음악극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무지크테아터를 음악이 중심이지만 그것이 ‘극장’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공연, 그 과정에서 무대의 언어와 관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때론 연주하는 동시에 기꺼이 연기해야 하는 공연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무대에서는 자연스레 들려오는 소리와 음악만큼이나 누군가의 손짓과 몸짓, 표정, 특유의 동세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무대 위를 거닐고, 소리치고, 자신의 몸을 연주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 장면은 분명 보통의 음악 공연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다. 꼭 ‘무지크테아터’가 아니더라도, 관객의 초점을 활짝 넓혀 무대 곳곳의 악기와 연주자의 생동한 움직임을 바라보게 만드는 이런 공연은 분명 조금 다른 표현을 필요로 한다. 리사이틀이나 콘서트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빠듯한, 이 독특한 무대의 주인공들이 ‘타악 연주자’라는 점이 꼭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슈토크하우젠 - 콧날개춤> ⓒ홍지영


  타악 연주자는 보통 음색과 리듬의 전문가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사실 오늘날 솔로 타악 연주자들이 해오고 있는 일들은 그보다 넓다. 그건 이들이 음색과 리듬을 다루는 동시에, 새로운 감각들을 계속 다듬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오케스트라의 뒤편에서 수많은 악기를 매번 새로이 마주하며 계속해서 자신만의 동선과 움직임을 오랫동안 찾아왔고, 음색과 음향이 폭발적으로 풍요로워졌던 20세기를 거치며 계속해서 음악의 영역으로 휩쓸려 들어오는 새로운 소리와 사물들을 받아들여왔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서 악기와 악기 아닌 것, 음악과 음악 아닌 것들을 모두 포용하며 계속 낯설고 새로운 것을 체화해왔을 것이다. 그런 풍요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무대 전체를 자유로이 오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상상하던 ‘타악 연주자’의 존재가 더욱 유력해지는 것을 느낀다.

  무대 곳곳에 놓인 수많은 악기를 연주하고, 말하고 노래하며 소리치고, 정교하게 또는 거대하게 움직이며,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형형히 빛난다. 이 탁월한 퍼포머들이 만들고 있는 그 무대들은 우리가 음악 공연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연주’라 불렀던 것은 어디까지인지, 음악 공연에서의 ‘무대’는 얼마나 유연하게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음악적인 경험’은 얼마나 다채로워질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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