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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윤무진의 플레이리스트] 이날은 좋은 일이 많았다 조회수 135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4-03-20 17:00:00






 

 

[윤무진의 플레이리스트] 이날은 좋은 일이 많았다 –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라벨,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BALCONY's Column | 클럽발코니 온라인 칼럼

글/윤무진 음악 칼럼니스트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아니스트 장에프랑 바부제를 보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작곡가 쥘 마스네가 먼저 떠오른다. 때는 2013년 10월 19일 토요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있었던 장에프랑 바부제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끝난 이후 나는 사인회 줄에 섰다. 사인을 받으며, 앙코르로 연주했던 마지막 곡의 제목을 피아니스트에게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차례가 되었고, 나는 준비한 질문을 건넸다. 그는 살짝 놀란 뒤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아! 마스네, 토.카.타.”

그 리듬, 그 억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롤리타>의 도입부에서 ‘롤리타’를 발음할 때 혀끝이 입천장을 타고 이를 톡톡 세 번 친다고 했었지. 나는 평소 이 도입부가 약간 유난 떤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장에프랑 바부제의 발음으로 이 ‘토카타’라는 단어를 듣고 난 뒤 조금 생각이 변했다. 발음과 함께, 혀 안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관찰하고 싶게 만드는 단어가 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한번 발음해 보시겠어요? 토.카.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나에게 토카타의 즐거움을 알려준 장에프랑 바부제를, 2024년 3월 9일 오후 7시30분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윤한결 지휘자가 지휘하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공연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 이날의 메인 프로그램은 2부 마지막 곡이 아닌, 1부 마지막과 2부를 시작하는 라벨의 두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첫 협주곡인 <피아노 협주곡 사장조>에서 장에프랑 바부제는 오래전부터 이 작품을 입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음악이 가지고 있는 요소를 부담스럽지 않게 적절하게 펼쳐내 보여주는 연주는 오래간만이었다. 2부 시작곡인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협주곡답지 않아 좋아하는 몇 안 되는 협주곡 중 하나. 스크랴빈의 <프로메테우스>처럼 피아노가 참여하는 교향시에 가깝게 들리는 이 작품을 연주하는 내내 바부제는 솔리스트가 아닌 피아노 파트를 맡은 단원처럼 오케스트라 속으로 녹아 들려 했고 국립심포니 또한 풍성해진 오케스트라 편성이 만족스럽다는 듯 이 협주곡에서 보다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청중의 환호에 즐거워하던 이날의 협연자는 라벨의 <물의 유희>를 연주했는데 그럼에도 박수가 잦아들지 않자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두 번째 앙코르를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이 작품은? 쥘 마스네의 <토카타>? 내림나장조의 세계를 오밀조밀 채우고 있는 음표들을 11년 만에 다시 만날 수 되었다. ‘역시 이번에도 토카타로군요 바부제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커튼콜 내내 웃는 얼굴로 공연장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오늘의 솔리스트가 무대를 떠나 있을 때, 윤한결 지휘자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연주했다. 이제 이번 공연의 시작과 끝을 맡았던 <풀치넬라>와 <불새> 이야기를 해보자. 작곡가가 신고전주의로 노선을 제대로 튼 이후 발표한 <풀치넬라>는 그 아기자기한 음향만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연주하기 대단히 까다로운 작품이다.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파트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이 작품을 연주하는 내내 국립심포니의 몇몇 단원들 또한 고생하는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날 악단이 들려주었던 불안한 앙상블을 너그럽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참으로 난처한 것이 이 <풀치넬라>는 특정 파트가 불안해지면 오케스트라 전체가 즉각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또 곧바로 객석에 전달되어 청중은 해소되지 못하는 불안감으로 고통받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마지막 곡인 <불새>에서는 사정이 훨씬 나아졌다. 솔로도 적지 않게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응집된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표출이 더 중요한 이 곡에서 윤한결 지휘자와 국립심포니는 <불새>라는 음악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충분히 끄집어내 들려주었다.

  여기서 갑작스러운 질문. 오케스트라 앞에 선 젊은 지휘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연주자 한 명 한 명이 내는 음을 지휘자는 어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음악의 전반적인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만큼은 오롯이 지휘자의 몫이다. 이날 윤한결 지휘자는 준비한 음악을 유념하며 매 순간 절도 있고 정확한 지시로 음악을 이끌어 나갔는데, 이러한 접근 방법은 젊은 객원 지휘자인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하면서도 확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그렇게 일반적인 정기 공연의 1.5배에 해당하는 듯한 어마어마한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자 피로감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들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정말 뜬금없는 비유일 수도 있겠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을 떠올렸다. 그는 지인의 결혼을 축하하며 이런 말을 남겼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 나는 늘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 이날 공연은 내게 이 문장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연주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순간이 훨씬 많았던 토요일 저녁. 지금도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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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발코니 (클럽발코니 온라인 칼럼 _ 2024년 3월 2호) ©clubbalcony.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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