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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ARTIST STORY] 베를린, 현의 유전학, 그리고 소멸 조회수 666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1-06-24 14:00:00
[ARTIST STORY]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 베를린, 현의 유전학, 그리고 소멸
Club BALCONY 매거진100호 (2021년 4~6월호) 中
글/양인모 바이올리니스트



 
얼마 전 발매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의 새 앨범 <현의 유전학>은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 같은 타이틀과 프로그램으로 꾸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은 객석을 꽉 채우면서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국인 최초 파가니니 콩쿠르 우승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있어도, 혹은 없어도 양인모의 음악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과 섬세한 매력, 음악 철학이 대단히 근사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난 호에 이어 연주자가 직접 쓴 에세이를 소개한다. 이번 원고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음반으로, 공연으로 만났던 양인모의 ‘현의 유전학’이라는 콘셉트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지, 각각의 프로그램에 대해 연주자는 어떤 고민을 했는지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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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4일 베를린에 도착한 나는 숙소에 짐을 풀고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기차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묵던 곳은 베를린 중앙역 근처였고, 광역 기차가 낮이건 밤이건 10분마다 찢어질 듯한 마찰음을 내며 시야를 오고 갔다. 역시 월세가 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마찰음이 들리면 난 가끔 창 밖으로 즐비한 철로를 스케이팅하는 열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철로가 현으로 보이고 열차가 활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열차에 올라탔다. 그 열차의 이름은 ‘현의 유전학’이었고, 출발지는 광기, 행선지는 소멸이었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에 대해 더 알아야 했다. 노스웨스턴 대학 교수 바버라 뉴먼이 독보적인 힐데가르트 전문가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의 책을 읽자 중세 시대 미의 기준, 중세 시대 음악과 텍스트의 관계, 중세 시대 음악의 현대적 해석법 등이 궁금해져 20만 원 정도를 들여 갖가지 논문을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다. 중세에 대한 어느 정도 문맥이 갖추어지자 오선지를 사서 떠오르는 음악적 아이디어를 적었다. 음들은 멜로디가 되었고, 멜로디는 프레이즈가 되었으며, 프레이즈는 형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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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이스의 ‘판타지아’에 나온 아르페지오 기법이 그 당시에 어떻게 연주되었는지 알아야 했다. 바로크 음악 전문가인 미국 말보로 페스티벌의 라이브러리언 코지 씨에게 연락했다. 작곡가 제미니아니(Geminiani)의 바이올린 학술서(violin treatise)를 추천받았고 그 책에 열거된 열아홉 가지 아르페지오 패턴을 연습하며 ‘판타지아’와 어울리는 것들을 찾아나갔다. 코렐리가 어떤 식으로 장식음을 구사했는지 알아야 했다. 장식음의 역사를 알기 위해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연주법』을 다시 읽었고, 포지션 이동 없는 장식음이 당시 권장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더불어 18세기 초 코렐리와 제미니아니를 비롯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사용하던 장식음을 기보화한 논문을 손에 쥐면서 악보에 기재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장식음의 논리와 기발함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라벨의 치간느를 하프와 합주할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 알아야 했다. 하프라는 악기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기존 하프 편곡 버전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치간느가 대단히 대중적인 곡임에도 논문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스티븐 휴브너의 <라벨의 치간느: 교묘한 가면인가, 키치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접했고 집시와 인상주의의 접합점, 음악적 패러디와 모더니즘의 근접성을 알게 되었다. 치간느를 하프로 재해석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소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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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과정 속에서 발견한 행복
나는 커피 한 잔과 크루아상 한 조각, 과일 스무디로 하루하루를 지냈으며 내 몸무게는 60kg를 겨우 넘었다. 내가 잠들 때 해는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비추었고, 내가 일어날 때 거리의 가로등은 장바구니를 들고 퇴근하는 사람들을 비추었다. 비타민 결핍으로 손끝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고 마그네슘 부족으로 하루에 몇 번이고 눈썹이 떨렸다. 카톡이 아무리 울려도 확인하지 않았고 친구들은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래도 난 행복했다. 내가 없어지는 대신 내 음악은 점점 형체를 갖추어갔기에.
넷플릭스 시리즈 ‘퀸즈 갬빗’에서 체스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주인공 베스는 밤마다 초록색 알약을 삼킨다. 왜일까? 베스는 신경 안정제에 중독된 것이 아니다. 약을 삼켰을 때 비로소 체감하는 자신의 가능성(potential)에 중독된 것이다. 한번 맛본 내 자신 2.0을 억지로 간과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불행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2.0 밑으로 내려가선 안 되고 나아가 3.0, 4.0이 돼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가능성이 꽤 경탄스럽다는 것을 깨달을 때 자연스레 소멸의 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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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과정 속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좋은 집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주말 오후 따뜻한 차를 즐기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행복은 그렇게 편안하지 않다. 적어도 예술가에게 행복이란 무언가에 몰두하며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이다. 모든 작품은 아름다운 시체다. 자해로 빚어진 상처 조각이자 삶이라는 족쇄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몸부림이다.
그렇게 몰두는 중독이 되고, 중독과 행복은 동의어가 된다. 그래서 벗어나지 못한다. 행복하기 위해 소멸해야 하기에. 이것이 레너드 번스타인이 하루 담배 100개비와 위스키 한 병에 의존하고, 우디 앨런이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됐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변론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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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들의 행동은 미화돼서는 안 된다. 다만 자기만의 예술을 영위하기 위해 남에게 끼치는 피해의 범위와 강도는 예술가 자신이 정해야 한다. 그 피해에 대한 합리적 매뉴얼 따위는 없다. 순수한 눈동자로 이슬만 먹으며 온전히 무해한 예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무한한 욕망을 가진 개개인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상처 없는 예술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평등할 수 없는 사회에서 우리들의 이기심을 들추는 것이야말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다.
2020년 11월 29일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레코딩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다시 한 번 창 밖을 보았다. 창에 반사된 나의 마른 몸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열차들이 중첩되어 보였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소멸했고, 고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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