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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즈, 붉은 광장에 입성하다: 젊은 쇼스타코비치와 재즈 조회수 324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1-06-10 12:00:00
[BALCONY Column] 황덕호의 20세기 음악과 재즈 6
- 재즈, 붉은 광장에 입성하다: 젊은 쇼스타코비치와 재즈
Club BALCONY 매거진100호 (2021년 4~6월호) 中
글/황덕호 KBS 클래식FM 을 진행하고 있으며, 경희대학교에서 재즈 음악사와 대중음악사를 가르치고 있다.
재즈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쓰고 우리글로 옮겼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에 태어나 1975년에 세상을 떠난 20세기 인물이었지만, 사회주의 국가라는 환경 때문에 서유럽이나 미국의 음악 사조와는 다른 음악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스탈린 1인 체제로 철의 장막을 드리웠던 소련은 미국 재즈 연주자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쇼스타코비치는 미국의 재즈, 혹은 서유럽의 대중적 왈츠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계속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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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당시 17세 소년이었던 알프레드 라이언은 그가 살던 독일 베를린의 한 스케이트장 근처에서 공연 포스터 한 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샘 우딩 오케스트라 베를린 공연. 호기심에 이 공연을 보고 재즈에 매혹된 소년 알프레드가 미국으로 건너가 14년 뒤인 1939년 재즈 음반을 상징하는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했다는 이야기는 재즈 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역사다. 그해 샘 우딩(1895~1985)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공연을 시작으로 함부르크를 거쳐 스톡홀름, 코펜하겐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출발지였던 베를린에서는 복스 레코드와 넉 장의 78회전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당시 소년 알프레드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그가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하고 얼마 뒤 기념비적인 음반을 녹음하게 되는 소프라노 색소폰의 거장 시드니 베셰(1897~1959) 역시 샘 우딩의 베를린 공연이 있은 지 약 3개월 뒤인 1925년 9월 유럽 땅을 밟았다. 베셰의 유럽 방문은 그로서는 두 번째로, 윌리엄 마리언 쿠크가 이끌던 서던 싱코페이티드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1919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의 첫 유럽 공연은 지휘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극찬으로 전설이 된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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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베셰의 두 번째 유럽 방문은 당시 뉴올리언스 재즈계에서 추방당했던 그의 처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1925년 9월 22일 프랑스 셰르부르에서 시작된 그의 유럽 투어는 임시변통의 여러 밴드를 거치면서 계속 이어졌고 그의 여정은 이듬해인 1926년 2월 22일 모스크바 공연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베셰는 춤추는 관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드미트로브카 영화관에 착석한 관객을 대상으로 재즈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 무렵 모스크바 청중들에게 재즈를 들려주던 인물로 베셰가 유일하지만은 않았다. 다름 아닌 바로 전해 비슷한 시기에 유럽을 방문해 소년 알프레드 라이언의 영혼을 빼앗았던 샘 우딩 오케스트라였다.
 

샘 우딩 오케스트라는 1925년 독일과 북유럽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그들이 정기적으로 출연하던 뉴욕 할렘의 스몰스 파라다이스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럽 공연은 한 러시아계 미국인 공연 기획자가 기획하고 샘 우딩이 음악을 맡았던 <초콜릿 키디스(The Chocolate Kiddies)>라는 제목(다분히 인종주의적이다)의 레뷔였는데 이 공연이 이듬해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공연으로 다시 한 번 성사되었던 것이다.
1926년 당시 신경제정책(NEP)을 실시하고 있던 소련은 경제적·문화적으로 제한적인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샘 우딩 오케스트라는 모스크바 볼샤야 사도바야 거리의 니키틴 광장 홀에서 <초콜릿 키디스>를 공연했고 몇 차례의 공연 중 하루는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직접 관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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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와 재즈와의 인연
하지만 음악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레닌그라드 공연이었다. 레닌그라드 음악당에 오른 <초콜릿 키디스>는 매우 특별한 프로그램들과 함께 연주되었는데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프리츠 슈티드리 지휘) 그리고 당시 유럽에 망명 중이었던 프로코피예프(1891~1953)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의 소련 초연 무대, 그리고 <초콜릿 키디스>가 한날, 한 장소에서 무대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음악당 객석에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졸업을 앞두고 있으면서 이미 교향곡 1번을 통해 천재 작곡가의 등장을 알렸던(하지만 곧이어 소련 프롤레타리아 작곡가 동맹으로부터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적 작품”이라고 비판받게 되는) 19세의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앉아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전기를 쓴 음악학자 로럴 페이는 ‘쇼스타코비치가 샘 우딩 오케스트라의 활기와 열정에 잊을 수 없는 감흥을 받았다’고 기록했는데, 이듬해인 1927년 쇼스타코비치가 미국의 뮤지컬 작곡가 빈센트 유먼스(1898~1946)의 ‘두 사람을 위한 차(Tea for Two)’를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재즈풍 작품 ‘타이티 트롯(Tahiti Trot)’을 만든 것은 그 영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곧이어 만든 발레 음악 <황금시대>에 이 곡을 삽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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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땅을 밟은 베니 굿맨
재즈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관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1929년 시드니 베셰가 노블 시즐(1889~1975)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그의 두 번째 소련 공연을 한 후 이 국가는 소위 철의 장막을 드리우기 시작해 향후 27년 동안 미국 재즈 연주자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지만(이 시기는 스탈린 1인 체제의 완성기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쇼스타코비치는 1934년 재즈 모음곡 1번과 1938년 버라이어티(혹은 야외 음악회)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왈츠 2번’으로 유명한 이 곡은 한동안 ‘재즈 모음곡 2번’으로 잘못 알려져왔다) 등 미국의 재즈, 혹은 서유럽의 대중적 왈츠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계속 쓰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시도가 완전히 불가능해진 것은 즈다노프의 완고한 사회주의적 미학 이론이 예술계를 완전히 장악했던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사망 후 1956년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가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해 연주회를 가졌던 해빙기가 찾아왔지만 27년 동안의 긴 공포는 쇼스타코비치를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단지 미국의 그 어떤 재즈 연주자들보다도 ‘두 사람을 위한 차’를 먼저 발견했던 그의 안목과 잘못 알려진 ‘재즈 모음곡 2번’ 때문에 불행하게도 묻혀버린 ‘재즈 모음곡 1번’의 진짜 ‘재지한’ 맛이 여전히 온전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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