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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제목 [ARTIST STORY]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조회수 92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1-02-18 14: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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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STORY]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우리의 음악에서, 구체성을 획득하기를
Club BALCONY 매거진 99호 (2021년 1~3월호) 中
글/양인모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보내온 에세이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도 멋지지만, 글은 기대 이상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음악이라는 추상을 얼마나 구체적인 형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의 논리와 비교한 관점은 대단히 신선하다. 아름다움의 이면, 과정의 솔직함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다음 원고도 청탁해봐야겠다 싶은 멋진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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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me Junkie. Park Predators. Dr. Death.
내가 요즘 즐겨 듣는 팟캐스트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모두 범죄 관련 이야기라서, 밤에 들으면 공포에 휩싸여 잠이 달아나는가 하면, 과연 문이 잘 잠겼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럼에도 이 끔찍한 실화들에 끌리는 이유는 팟캐스트 진행자의 스토리텔링이 이야기를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썰’을 푸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야기 속 중요한 부분과 덜 중요한 부분,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과 단지 정보 전달이 목적인 부분을 명확히 설정하고, 특히 이야기의 절정으로 치닫기 전 빌드업의 페이스를 조절하여 듣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기대 수명이 매일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지만 100시간 넘게 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범죄 수사에 관해 얄팍한 지식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독히 비인간적인 사건들을 수사하는 과정이 내가 음악을 접하는 나의 태도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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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렸을 적 셜록 홈즈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바이올린을 하는 형사라, 멋지지 않은가! 그런 내겐 한 가지 불만이 있었는데, 그 흥미진진한 소설들을 다 읽고 나면 항상 찝찝한 감정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결론을 알고 나니 너무 허무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이걸 몰랐지?’ 모든 게 삽시간에 설명되는 마지막 장을 읽으면 기대에 차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최근에 와서야 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수십 년 후에나 진범이 잡힌 살인 사건이 허다하고, 지금까지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조차 없는 미제 사건들도 너무 많다. 아무런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유일한 의존처는 형사의 결단력이고, 그 결단의 날카로움에 따라 수사의 진전 여부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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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심장과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직관
연주자에게도 정체된 수사의 얼음을 깨부술 만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 확신은 절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고대 유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래! 여기는 이렇게 연주하는 게 맞지!’라고 막연히 느끼는 순간, 당신은 진실에서 더 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음악적 확신은 쓰나미처럼 밀려오지 않는다. 여러 단계를 거쳐 형성되는 확신의 아우라는 패턴사가 한 땀 한 땀 바늘을 꿰매는 과정과 더 비슷하다.

광활한 미국 중부의 국립공원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실종됐을 때, 오로지 감정에 의거해 수색 대원을 파견하는 형사는 없다. 목격자를 찾고 휴대전화, 신용카드 내역 등을 조사하며 명백한 근거를 기반으로 실종자의 동선을 최대한 좁히는 것이 당연히 필수적이다. 물론 음악은 감정을 다루기에 정해진 매뉴얼 따위는 없지만, 그렇다고 매일 달라지는 기분에 따라 해석의 잣대를 세우면 끝없는 골짜기와 절벽에 무작위로 인력을 배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형사가 목격자와 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연주자도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 연주자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자기가 고작 악력 좋은 기술자라는 것을 시인할 때 비로소 음악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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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감정적 방종으로 빠져서는 안 되는 것
‘추상’이라는 핵우산 아래 감정적 방종이란 면죄부를 내세우며 음악을 추구하면 그 음들의 파동은 멀리 뻗어나가지 못한다. 나는 진동 주파수가 음의 높낮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리의 근원에 어떤 의도가 자리 잡고 있는지에 따라 파장이 형성되고 나아가 레토릭의 영역이 열린다.
여기서 이 의도를 구성하는 요인들이 연주자의 손놀림과 얄팍한 직관에 국한된다면 그것에서 비롯되는 결과물은 더 이상 의도가 아닌 사고(事故)에 더 가깝다. 연주자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 특정한 형태로 길든 근육 조직들이 연주하는 것이다. 신체적 답습과 일시적인 감정의 분화 간의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게 되고 그것은 난데없이 일어나는 접촉 사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 현장이 곡이 지니는 천부적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어 대형 사고로 인지되지 않을 뿐이다. 사고가 나면 아무리 독선적인 사람도 자기의 잘못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끝내 수치와 무능력함이 자신을 좀먹기 시작할 때 도움을 구걸하면 된다.

형사가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고 사건을 조사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 직업이라서 그렇다기보다, 가슴이 무너졌을 피해자의 가족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의를 되찾아주고 싶어서일 것이다. 확실한 동기는 도움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음악에 대한 연주자의 열정이 실종자를 찾는 것처럼 급박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의 어젠다(agenda)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소스를 참고하고, 어떤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어떤 문맥적 노선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곡이 단순해서라기보다 연주자가 자기 연주에 도취했기 때문이다. 토끼굴이 무서워 방어 체계가 가동되면 표현은 자기만족으로 귀결되고, 다른 이들에게 도달할 힘이 없다. 연주자와 곡의 관계에도 뚜렷한 단계가 존재한다. 그 단계를 감지하는 척도는 얼마나 곡에 익숙해지는지가 아니라 멀어지는지이다. 이 아이러니한 이질성은 사실 연주자가 곡에 대한 주관을 확립하는 과정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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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를 거스를 정도의 확신,
새로운 견해가 이끌어내는 것

많은 사람들이 1962년 카네기홀에서 벌어진 글렌 굴드와 레너드 번스타인의 일화를 기억할 것이다. 굴드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협연 무대는 당시 지휘를 맡았던 번스타인의 유명한 연설로 시작된다. 굴드의 템포가 악보에 기재된 템포와 상당한 차이가 났고 번스타인은 이색적인 굴드의 해석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번스타인은 그런 해석의 신선함(freshness), 확신(conviction), 명랑함(sportive[...])을 강조하며 굴드의 태도에 박수를 보냈다.
그는 왜 브람스가 써놓은 템포보다 현저히 느린 템포를 선택했을까? 악보를 거스를 정도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 번스타인은 몇 년 후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굴드는 1악장과 2악장이 모두 6박자 계통이라는 점에 주목했고 ‘아디지오(adagio)’인 2악장과 ‘마에스토소(maestoso)’- 이 지시는 ‘위풍당당하게’라는 뜻으로 템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인 1악장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다고 언급했다.
사람들이 그의 해석에 동의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확신에서 비롯된 새로운 견해가 활발하고 때로는 불편한 담론을 이끄는 것이야말로 음악가가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부분이다.

연주자들이여, 당신의 음악이 아무런 인기척 없는 절벽 아래 엎드린 채 산산조각 나 있는 시체를 발견한 것과 같은 끔찍한 구체성을 획득하길 바란다. 모든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역겨운 벌레들이 들끓고 있기에.

 

양인모 바이올린 리사이틀 <현의 유전학> cli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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