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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 스페인식 죽음의 미학
황지원 2017-06-21 938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도시 세비야는 실로 검붉은 정열의 땅이다. 플라멩코가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격정적인 투우경기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열정의 힘 때문인지 세비야는 유독 오페라 무대의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재다능함의 대명사 플라시도 도밍고가 아예 세비야 배경의 오페라를 한데 모아 테너와 바리톤 배역을 모두 불러가며 영상물 하나를 만들기도 했으니, ‘세비야를 찬양하며’라는 제목이었다.

오페라 속의 세비야 남자들은 대개가 바람둥이다. 우선 알마비바(Almaviva) 백작 이야기부터 해보자. 그는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셰의 3부작 희곡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로시니와 모차르트에 의해 오페라에서도 스타가 되었다. 로시니의 <세비야(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는 청년시절 백작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만나 볼 수가 있으며,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이 여자 저 여자 기웃거리는 실속 없는 중년남성으로 등장해 우리의 배꼽을 잡게 만든다. 요즘은 아예 대서양 저 멀리 칠레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와인에 알마비바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니, 아마 세비야 땅에서 태어난(?) 남자 중에서도 가장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게 아닌지 모르겠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의 주인공 백작 돈 조반니도 세비야 출신이다. 그는 고향 땅을 홈그라운드 삼아 독일, 터키, 프랑스, 이태리를 주유하며 엽색행각을 벌인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 남은 건 허무와 회한뿐. 세비야에는 돈 조반니 백작의 실제모델이었던 미겔 데 마냐라가 말년에 참회하여 자선사업을 펼친 병원건물이 남아 있지만, 적어도 모차르트 오페라 속의 조반니는 반성 같은 건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적 쾌락주의자’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창가로 와요 나의 연인이여 ㅇeh vieni alla finestra’,
베이스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그러나 아무리 세비야 출신 바람둥이 남자들이 차고 넘친다 해도 이 여인의 카리스마와 예술적 영향력에는 아예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카르멘(Carmen). 어쩌면 인류 역사가 낳은 가장 위대하고 강렬한 캐릭터의 이름이다.
(지금은 세비야 대학 건물이 되어 있는 ‘카르멘’의 담배공장)
지금은 세비야 대학 건물로 변해 있는 왕립 담배공장의 지저분한 건물 안에서 담뱃잎을 말아내던 매력적인 집시 여인 카르멘은 잠깐의 휴식동안 담배 한 대를 꼬나물며 이렇게 내뱉는다. “사랑은 말을 듣지 않는 반항적인 새와 같아. 그렇게 이리로 왔다가 저리로 날아가지. 남자들이 여자를 고른다고? 천만에. 나는 내가 선택한 남자와 사랑을 할 거야.” 세비야의 모든 남정네들이 끈적거리는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오직 한 남자만이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왔다는 고지식한 하사관 돈 호세. 되려 흥미가 솟은 카르멘이 붉은 꽃 한송이를 호세의 가슴에 던지고, 그 꽃은 곧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꽂힌다.
(비제 <카르멘> 하바네라 ‘사랑은 반항적인 새’, 메조 소프라노 엘리나 가랑차)

피레네 산맥의 남쪽에 펼쳐진 이베리아 반도는 예로부터 정통 유럽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피레네 이남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땅을 ‘아프리카와 같다’라고까지 했다. 전성기에는 강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이지만 19세기에 이르면 정치적으로 유럽의 중심부와 단절되고,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이질적이고 소외된 미지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던 스페인이 유럽 전역에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는 오페라 <카르멘> 덕분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가 1875년에 발표한 이 오페라는 플라멩코 춤과 투우 등 전통 스페인 문화를 매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떠돌이 집시들의 방랑기질, 스페인 특유의 정열 등을 강렬하고 화려한 관현악으로 완벽하게 표현하여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비야는 앞서 말한대로 투우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인간과 소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직면하여 뜨거운 혈투를 벌이는 이 야만적이고 극단적인 유희는 뜻밖에도 정교한 형식미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을 조련하고 결정하는 섬세하고 기교적인 법칙이 검붉은 피가 치솟는 어둡고 원초적인 에너지와 공존한다. 작가 헤밍웨이도 여기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의 논픽션 <오후의 죽음>은 스페인 투우에 바치는 헌사다. "삶과 죽음을, 이를테면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전쟁이 끝난 오늘에 와서는 투우장뿐이다.“

오페라의 피날레도 투우 경기장이 배경이다. 카르멘은 이제 유명 투우사인 에스카미요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상태다. 카르멘의 유혹에 정혼자를 버리고 삶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호세는 절망에 찬 심정으로 마지막 호소를 보낸다.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할 뿐이다. 세비야 최고의 투우장인 토로스 델라 마에스트란사(Plaza de toros de la Real Maestranza)에서 에스카미요가 싸움소의 등에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는다. 바로 그 순간, 절망과 미련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던 호세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카르멘의 가슴에 비정한 단검을 찌른다.

비제가 주목한 것은 이 스페인식 죽음의 미학이었다. 여주인공 카르멘이 한 남자의 속박을 거부하고 차라리 죽음으로 영원한 자유를 택하는데, 그 시간이 마침 한낮이다. 지중해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가 죽어가는 것이다. 이 ‘태양 아래의 죽음’은 너무도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고요한 밤의 애절하고 낭만적인 피날레 대신,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검붉은 선혈이 낭자하는 격렬한 죽음의 장면이 펼쳐진다. 관객들은 힘겨워했다.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고, 비제는 시름 속에 30대의 나이로 요절했다.
(비제 <카르멘> 피날레 ‘카르멘의 죽음’, 테너 루이스 리마, 메조 소프라노 마리아 유잉)

그러나 이제 <카르멘>은 프랑스 오페라의 가장 찬란한 별이 되어 있다. ‘맺고 끊음이 불분명하다’, ‘느물느물 잘 넘어가는데 결정적인 선율이 없다’는 등 그간 프랑스 오페라에 쏟아졌던 온갖 불만을 단숨에 잠재운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호아킨 로드리고 등 20세기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스페인 예술가들도 <카르멘>이 불러 일으킨 고국에 대한 관심과 찬사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사라사테, 왁스만, 부조니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카르멘>을 테마로 한 관현악 모음곡과 환상곡을 발표했고, 발레와 영화,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새롭게 각색된 것이 이미 백 여 편이 넘는다. 타오르는 태양과 붉은 꽃, 그리고 단검이 빚어낸 스페인식 비극 <카르멘>. 차라리 죽어서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던 집시 여인 카르멘은 예술 사상 가장 위대한 캐릭터가 되어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서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사라사테 <카르멘 환상곡> 바이올린 길 사햠, 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를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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